폐암 선고를 받은 아내는 수술을 받았지만 치료에 실패했고, 이내 온몸에 암세포가 퍼졌다. 암은 시신경까지 전이되었다. 진통제가 없으면 잠조차 편히 자지 못했고, 순하기 짝이 없던 사람이 차마 듣기 힘든 모진 소리를 했다. 나를 좀 보내달라고. 삶의 끈을 놓고 싶다고.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제야 내 잘못을 알았는데, 이제야 아내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는데... 언제나 후회는 뒤늦게 찾아온다.
왜 예전엔 아내의 소중함을 몰랐을까. 그동안 나는 집안일 한 번 도와준 적 없는 이기적인 남편이었다. 못나게도 전처와의 관계에서 받은 상처를 핑계로 고마운 아내에게 살갑게 대해주지 않았다.
아프고 나서야 아내가 눈에 들어왔다. 매일 아침 아내가 일어나면 입을 맞춘다. 머리를 빗겨주고, 소파에 앉아 TV를 볼 때도 꼭 손을 잡는다. 소중한 것이 곁에 있을 때 알지 못하고 그것이 떠나려 할 때 비로소 붙잡는 어리석음.
중매로 만난 아내는 돌아서서 가는 내 뒷모습을 보고 축 처진 어깨가 가슴 아파서 나를 선택했다고 한다. 아내는 어린 시절 부모님이 이혼하고, 새엄마 밑에서 어렵게 자란 상처가 있다. 그래서 자신이 서러웠던 만큼 당시 10개월이던 전처 소생 재국이도 상처 없이 자라길 바랐다. 그리고 아내는 누구보다 그렇게 해주었다. 그 덕에 아내와 함께한 세월 동안 나와 아이들은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만큼 아내의 고생은 컸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기 몸 한번 돌보는 법 없이 가족만을 위해 살았다.
아내가 아프고 4번째 가을이 찾아왔다. 요즘 외출할 때 나와 아내는 손을 꼭 잡고 다닌다. 금슬 좋은 부부처럼 보일까? 사실 우리에겐 절박한 이유가 있다. 암이 뼈까지 전이되어 이제 넘어지면 그대로 뼈가 부러질 만큼 약해졌다. 갈비뼈, 허리, 대퇴부까지 암이 퍼져 있었다. 요추는 모두가 암 덩어리 자체였다. 더 이상 할 치료도 없다. 아내를 등에 업고 다시 집으로 갈 밖에. 등에 업은 아내가 너무 가벼워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았다.
먹기만 하면 토하던 아내는 이제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아내를 놓고 싶지 않다. 그러나 아내는 이제 내 손을 잡고 있기 힘들어 한다. 견디기 힘든 극심한 고통에 아내는 자꾸 무너진다. 그래도 아내가 집에 있으면 방에만 누워있어도 사람 사는 집 같다.
아내가 통장과 보험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글씨를 쓸 기운이 없는 아내의 말을 받아 쓰고 정리하는 사소한 일에서조차 재국이와 나는 감정이 상하기 일쑤다. 나는 재국이의 일처리가 못 미덥고, 재국이는 알아서 잘하고 있는데 잔소리하는 내가 못마땅하다. 나와 재국이가 부딪치면 아내는 화를 낸다. 마음 놓고 갈 수 있겠냐고. 아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싶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안 떠날 수만 있다면 좋겠다.
아내가 정리해준 빽빽한 리스트를 받고 보니 늘 사소하게 생각했던 아내의 일들이 뭐 이리 복잡하고 많은지. 새삼 아내에게 고맙고 미안했다. 지금껏 아내는 큰 품으로 나를 감싸주고 있었다.
오늘은 아내의 마흔아홉 번째 생일. 건강할 땐 날짜조차 잊고 무심하게 지나쳐 버렸던 아내의 생일이 이렇게 소중한 날이 되다니. 아침 일찍 생일상을 차려 한 숟갈씩 조심스럽게 떠먹여 줬다. 주는 대로 잘 먹으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아내의 친구들을 초대했다. 사람을 좋아하던 아내는 친구가 많았다. 한걸음에 달려온 친구들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하지만 곧 말을 잇지 못했다. 침대 옆에 앉아 이리저리 말을 붙이다가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 눈물을 흘리는 친구도 있다. 모든 친구들은 생일상이 다 식도록 수저를 들지 못했다.
"고맙다." 주위가 조용해진 틈에 아내가 친구들에게 말했다.
"뭘 고맙노. 우리가 항상 너 생일도 제대로 못 챙겨줬는데. 우리가 미안치. 내년에 또 하자. 내년엔 더 크게 하자."
침대 곁으로 모여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케이크의 촛불을 불었다.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아내의 친구들이 한 명씩 아내에게 인사를 했다.
"잘 가라. 울기는 왜 우노." 오히려 아내가 친구들을 위로한다. "밥 잘 먹고 간다. 정신 차리고 있어, 또 올게." 친구들은 아내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나직하게 마지막 인사를 한다. 아내도 친구들도 안다.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냥 또 만나자 인사를 나눈다.
6월 5일 아침 10시 25분, 아내는 왔던 곳으로 조용히 돌아갔다. "잘 가라. 저 멀리 잘 가라. 거기서 아프지 말고, 잘 살고. 나중에 거기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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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22주년 기념일. 나는 아직 홀로 이 자리를 지킨다. 재국이는 벌써 서른이 되었다.
아내, 김경자를 사랑했다. 더 일찍 알지 못했지만 사랑했기에 결혼했고, 사랑했기에 2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했다. 아내가 떠난 빈자리는 시간이 지나도 메꿔지지 않는 허전함이 남는다. 그리고 못 해준 것들이 남아 후회가 된다.
그러나 남은 사람들이 해야 할 것은 후회나 자책보다는 느껴지는 빈자리의 크기만큼의 사랑일 것이다. 사랑한다면 늦은 때란 없다.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은 여전히 사랑, 사랑이다.
아직도 볼 때마다 설레는 예쁜 아내. 6년 전 5월, 경복궁에서 우연히 한국에 여행 온 아내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후광이 비친다는 게 뭔지 그때 비로소 알았다. 운명이란 그런 건지 아내 역시 별로 잘생기지도 않은 나를 보고 딱 들은 생각이 '귀엽다, 보조개'였다고 한다.
아내가 태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난 열렬하게 구애했다. 우리는 주저 없이 결혼을 결심했다. 하지만 집안의 반대에 부딪쳤다. 4개 국어를 하는 아내는 호주 유학을 앞둔 태국에서도 엘리트 집안의 막내였고, 더욱이 우리 부모님은 동남아 사람에 대한 편견이 있으셨다.
중학교 때부터 신문배달과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했던 나는 전문대를 졸업하고 카지노딜러로 일하고 있었다. 가진 건 없지만 건강했고, 사랑했기에 두려움도 없었다. 나란 놈을 만나 사랑 하나 믿고 덜컥 한국에 온 아내는 나를 좋은 아빠, 좋은 남편이 되게 해주는 여자였다. 그리고 바로 수현이가 우리에게 왔다. 수현이의 탄생은 힘겹기만 하던 내 인생의 축복이었다. 이 행복이 영원할 줄 알았다.
작년 봄 수현이가 백혈병 진단을 받았을 때 나는 믿지 않았다. 양가에 누구도 암환자가 없었다. 아내는 자기가 뭔가 잘못한 탓인 것 같다며 스스로를 책망했다. 독한 투약을 위해 손바닥만 한 아이 가슴에 주사 구멍을 뚫으면서도 요즘은 의술이 발달했으니 금세 고칠 것이라고, 항암치료면 나을 수 있다는 말을 믿었다.
그런데 수현이는 백혈병 중에서도 굉장히 희귀한 암이라 꼭 이식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때까지도 당연히 일치자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보통 80~90%는 일치자를 찾는다고 했다. 불안해하는 아내에게도 걱정하지 말라고, 이식만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안심시켰다.
그런데 없었다. 관련 있는 모든 단체에 연락해 봤지만 국내 기증자 26만 명 중 수현이와 유전자 유형이 맞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내는 혹시 태국에는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태국 전역을 뒤졌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수현이는 독한 항암치료를 7차까지 받아야 했다. 열이 펄펄 끓다 못해 40도는 우습게 올라갔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구토를 하며 배가 아파 우는 어린 아들을 바라보며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밖에.
온 세상을 뒤져서라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전 세계 2,600만 명이 넘는 기증자 중에서도 수현이와 맞는 사람은 없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거짓말 같았다. 한 명은 있을 거 같은데, 한 명 정도는 있을 것 같았는데... 수현이가 아픈 게 모두 엄마의 잘못이라고 아내는 자꾸 자기 탓을 한다. 그렇게 밝던 아내가 말수도 줄고 어떤 슬픔도 속으로만 삭인다.
작년 가을, 기적처럼 중국에서 3명의 기증자를 찾았지만 허무하게도 2명은 거절했고, 1명은 정밀검사 결과 불일치 판정을 받았다. 정말 피눈물이 나왔다. 세상이 다 미웠다.
힘없이 웅크린 채 누워 있는 수현이를 보면 아내와 내가 서로 사랑하면 안 되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았다면 수현이에게 이런 아픔이 없었을 텐데. 사랑한다는 이유로 앞길이 창창한 아내를 붙잡는 게 아니었다. 내 사랑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아빠 추워." 또 다시 수현이가 열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수현이의 몸을 부지런히 닦으며 덜덜 떠는 아이를 달랬다. "수현아 힘내야 돼, 알았지?" "응." "우리 수현이, 잘하고 있어. 그러니까 좀만 더 힘내자, 응?" "응." "손 잡아줄게, 수현아. 아빠가... 손 잡아줄게."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아내와 나는 전단지를 만들어 길거리에서 나눠 주었다. "부탁합니다. 한 번만 읽어 봐주세요." 각종 단체, 교회, 군부대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전화를 하고 또 찾아갔다.
수현이의 얼굴이 들어간 전단지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걸 보면 너무 가슴이 아팠다. 쓰레기통에 버려진 전단지가 보이면 모두 주웠다. 구겨진 부분을 반듯하게 펴며 몇 번을 울었는지 모른다.
한편으로는 세상에 고마운 사람들이 정말 많다는 것도 알았다. 휴직을 한 내 딱한 사연을 알게 된 200여 명의 회사 동료들이 조혈모세포 기증에 나서 주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수현이에게 맞는 기증자를 찾을 수는 없었다. 마지막 희망이 사라졌다.
아내와 아이 앞에서는 강한 척을 했지만 혼자 있을 때는 나도 너무 불안하다. 온갖 생각을 주체할 수가 없다. 그래도 강해져야 한다. 흔들리면 안 된다. 나는 아빠니까.
항암치료로 인해 머리카락이 모두 빠진 수현이를 위해 나도 머리를 밀었다. 자신과 똑같은 모습이 되어가는 아빠를 보며 신이 난 수현이가 까르르 웃었다.
우리는 반일치이식을 하기로 결심했다. 일치자가 아닌 반일치자의 조혈모 세포를 이식하는 것으로 위험 부담이 큰 수술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이 각각 50%의 유전자를 물려준 부모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었다. 아내는 자신이 해주고 싶다고 했다. 아이에게 해준 것이 없다고. 수혈을 하듯이 엄마의 조혈모 세포를 천천히 수현이에게 넣어주었다.
수술 후 2주 정도까지 수현이의 몸 상태는 괜찮았다. 하지만 안심하던 찰라 거부반응은 갑자기 왔다. 빨갛게 피부 이상이 나타나더니 갑자기 온몸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숙주병이라 불리는 이식 부작용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피부 숙주반응이 온 것이다. 노련한 의료진조차 당황했다. 병원에 비상이 걸렸다. 지금까지 반일치 이식한 환자들 가운데서도 보기 힘들만큼 심한 거부반응이라고 했다.
온몸이 울긋불긋 물집이 잡힌 수현이가 쪼그리고 앉아 손가락만 만지작거리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이렇게 순한 아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런 고통을 주는 걸까.
지금까지 잘 참던 수현이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너무 아프다고 호소했다. 보드랍던 피부가 심한 발진으로 보고 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너무나도 애처로웠다. 지켜주겠다고 했는데, 부모가 돼서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니. 가슴이 무너졌다. 그리고 퇴원은 무기한 연기됐다.
봄이 왔다. 나는 여전히 수현이 곁에 24시간 붙어 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 "나중에 아빠랑 목욕탕 같이 가자." "응." "수현이 최고." "응!"
수현이는 마침내 숙주병을 이겨내고 회복세로 돌아섰다. 피부에는 아직 흉터가 남아 있었지만 10년이 지나면 다 없어질 것들이다. 장한 내 아들, 수현이. 아내는 매일 부지런히 반찬을 만들어 병원으로 싸가지고 온다. 아내를 보면 나는 괜히 아침도 못 먹었다고 엄살을 피운다.
"맛있다!" "짜지 않아?" "응, 조금 짜." 웃음이 나온다. 괜히 음식 투정하며 사랑하는 아들 곁에 있는 이 사소한 일상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아내는 예전의 해맑은 웃음을 되찾았다. 함께 빡빡 밀었던 내 머리는 제법 자랐다.
"수현아, 엄마는 아빠 거." 엄마를 덥석 끌어안는 아빠를 보며 수현이가 까르르 웃는다.
그리고 병원에 입원한 지 석 달. 오늘 우리 세 식구는 퇴원한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 용감하게 달려와 준 고마운 수현이. 설령 수현이에게 아직 갈 길이 남았다 해도 우리는 두렵지 않다. 우리의 사랑은 결코 잘못되지 않았다. 사랑은 아낌없이 내 걸 내주고 다시 한 번 더 주는 것이다. 우리는 가족이다.
나는 개구쟁이 두 아들, 그리고 남편과 함께 서로를 아끼며 단란하게 살아가고 있는 가정주부이다. 남편은 아이들에게 다정한 아빠이자, 나에게도 늘 웃음을 주는 유머감각이 있는 남편이다. 아이들은 또래 보다 제 할 일을 스스로 찾아 할 줄 알고 예의가 바른 편이라 걱정이 없다. 우리 집은 그야말로 행복이 가득한 집이다.
그런데 어느 날, 깜짝 놀랄 소식을 들었다. 시골에 홀로 계신 엄마가 3일을 굶어 쓰러진 채로 발견된 것이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농사일에 집안일까지 정정하게 하시던 엄마인데. 무슨 까닭인지 몰라 시골집으로 가는 내내 가슴을 졸였다.
억척 엄마. 엄마는 그랬다. 아들 넷, 딸 넷을 혼자 몸으로 키우느라 밤낮없이 일만 했다. 일찍 남편을 떠나 보낸 후, 시골에서 품을 팔아가며 8남매를 올곧게 키워내는 것, 그것이 엄마 인생의 목표였다. 쉼 없는 노동. 그 대가로 엄마는 농사지을 땅을 소유했고 자식들이 머물 수 있는 집을 가졌으며 8남매 모두 잘 성장했다.
이제 인생의 즐거움을 누려야 할 때, 엄마에게 치매가 찾아왔다. 그토록 강인한 정신력의 엄마에게 치매가 왔다. 자식들이 모두 떠나가고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리셨던 걸까? 나는 엄마를 그냥 둘 수 없어 집으로 모시고 왔다. 엄마에게는 일곱 번째 자식이지만 그냥 내가 모시기로 했다. 너무 늦게 엄마의 고통을 알게 되어 죄스럽기만 하다. 다행히 남편은 아픈 장모님을 집으로 모시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오히려 엄마를 나보다 더 살갑게 대하며 가슴으로 껴안는다. 역시 멋진 내 남편이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우리 집의 아침 풍경은 언제나 비슷하다. 아이들을 챙기고 남편도 살뜰히 챙겨 출근시키고 나면 엄마가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아이가 되어버려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엄마. 40년 전 엄마가 아기인 나에게 해준 것처럼 아기가 된 엄마를 돌본다. 씻기고 먹이고 입히고 화장실에 시간 맞춰 데리고 가고. 아직은 엄마가 내 이름을 불러주니 다행이다. 언젠가는 그마저도 기억에서 지워버릴 것 같아 겁이 난다.
"승애야, 지금 나가야 하는디." "엄마, 어디 가고 싶은데?" "송광굴에 가서 일해야 혀." "무슨 일... 이젠 안 하셔도 돼." "콩도 심고 밭도 갈고."
엄마에겐 땅(송광굴)이 세상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 땅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고 모든 것이 나왔다. 그곳에서 거둔 것들로 8남매를 먹이고 키워냈다. 땅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러니 매일 돌보러 나가고 일해야 하는데, 그 땅이 이곳엔 없다. 엄마는 창 밖으로 보이는 아파트 단지를 보며 안절부절못한다. 그 땅에 건물이 들어서서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올해 일흔일곱 살 김종례. 엄마는 '본동댁'이라고 불린다. 한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평생을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할 일이 없다는 건 평생을 노동으로 살아오신 분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그래서 평일 낮 동안 치매노인보호센터로 보내드린다. 엄마에게는 거짓말을 했다.
"엄마, 그곳에 가서 일하면 하루 7천원에서 만 원 정도 버니까, 돈 벌러 가시는 거야. 알았지?" "그럼, 일해야지. 일해야 돈을 벌지."
당뇨, 고혈압에 관절염까지 겹쳐 한 움큼씩 약을 드셔야 하는 불편한 몸으로 엄마는 기꺼이 일하러 가신다. 엄마는 그 시간이 즐겁다.
엄마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고 '우산댁'이라 한다. '우산댁'은 엄마의 엄마, 그러니까 나에게는 외할머니다. 외할머니가 살아 돌아오셨다고 믿는 엄마. 엄마는 거울을 보며 외할머니 끼니를 챙겨드렸냐고 묻는다. 물론 나도 식사를 잘 챙겨드렸다고 응수한다. 엄마에게 가장 그리운 사람은 외할머니였을까? 엄마에게도 엄마가 있다. 엄마도 언제나 엄마의 품을 그리워하며 보고 싶어 하셨을 테지. 그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다.
처음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 엄마는 영원히 건강할 거라고 굳게 믿었다. 내 기억 속에서 엄마는 강하고 엄한 분이었다. 그런 엄마였는데, 한순간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엄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시간 날 때마다 장모님 옆에 나란히 누워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껄껄거리는 남편과 사위 앞에서 수줍은 듯 입을 가리고 웃는 엄마, 그리고 자신들보다 할머니에게 엄마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두 아들에게서 힘을 얻었다. 엄마는 불청객이 아니라 우리 가족이었고 그 변함없는 사실은 우리 가족을 더 끈끈하게 이어주었다.
명절이 되어 고향집으로 가는 길, 쉬지 않고 5시간을 내리 달린다. 벌교 집에 가족들이 모두 모였다. 이번이 여기에서 보내는 마지막 명절이다. 엄마는 본동으로 돌아와 즐거운지 웃음이 그치지 않는다. 부엌에선 며느리들과 딸들이 설음식 준비로 부산하다. 몇 년 전만 해도 명절이면 엄마가 주방의 수장으로 호령하며 음식 준비를 도맡았는데, 이제는 멀찍이 떨어져 물끄러미 부엌을 바라보신다. 아내로 엄마로 새벽부터 밤까지 노동으로 살아온 인생. 그 고단한 인생의 끝에서 치매를 만나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예전부터 남편은 명절이 끝나고 돌아갈 때면 가장 늦게 올라가자 했다. 많은 가족이 붐비다가 홀로 남으실 장모님 생각에 발길이 안 떨어진다 했다. 손수 농사지은 먹거리를 잔뜩 싸주시며 잘 지내라는 말을 연거푸 하시는 장모님의 외로운 웃음을 보기가 힘들다 했다. 혼자라는 사실 앞에서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오늘도 엄마는 나갈 문을 찾아 온 집 안을 빙빙 돈다. 콩을 심어야 할 때라고 밭에 나가봐야 한다는 엄마. 이어지는 실랑이에 엄마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릴 방법을 궁리하다가 슈퍼에 가서 흰 콩과 검은 콩을 사왔다. 한데 섞어 엄마 앞에 내려놓는다. 엄마는 흰 콩과 검은 콩을 따로 담느라 손을 부지런히 놀린다. 할 일이 생겨 집중하는 엄마. 색깔 별로 잘 고르시다가도 흰 콩이 검은 콩 그릇으로 가기도 하고 검은 콩이 흰 콩 그릇으로 가기도 하고, 끝이 없다. 콩 고르기는 엄마의 큰 일감이 되었다.
올 봄 초등학교에 입학한 작은 아들은 할머니가 오신 후부터 예민해졌다.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다가 할머니 존재때문에 힘든가 보다. 그래도 아이들은 할머니가 오신 후에 달라진 삶을 오히려 어른보다 잘 받아들였다. 그런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고맙다. 좀 더 신경 쓰지 못해 속상하지만 이런 부모의 모습을 보며 잘 성장하리라 믿는다.
오늘은 엄마를 모시고 병원에 다녀왔다. 처음 엄마를 집으로 모시고 왔을 때는 30점 중 16점이었는데, 지금은 7점으로 더 안 좋아지셨다. 첫 검사에서 이미 중증이었지만 정성으로 보살펴드리면 나아질 거라 믿었는데 현실은 내 편이 아니다. 뇌 부피가 더 작아졌고 언제 시설로 보내드려야 할지 이제는 생각해봐야 한다는 의사의 말이 가슴에 와서 박힌다.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뭐가 부족한 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더 이상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으니 더욱 가슴이 아프다.
엄마와의 시간이 얼마나 지속될까? 엄마는 아직 딸을 잊지 않았다. 언젠가는 내 이름과 얼굴을 잊을 때가 올지도 모른다. 존재가 지워지는 날, 그날이 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길 수 없는 싸움.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 하지만 오래도록 할 수만 있다면 그 싸움을 계속 하고 싶다.
내 곁에 오시고 몇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엄마와 함께할 수 있어 행복하다. 엄마는 여전히 우리 엄마고 나는 그녀의 딸이다. 엄마와 나의 시간은 오늘도 흐른다.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엄마 옆에 내가 있고 내 옆에 엄마가 있기에,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기에, 우리 집은 행복이 가득한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