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아보니까 사람들은 남의 삶에 그다지 관심이 많지 않다. 그래서 남을 쳐다볼 때는 부러워서든, 불쌍해서든 그저 호기심이나 구경 차원을 넘지 않더라
내가 살아보니까 정말이지 명품 핸드백을 들고 다니든,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든 중요한 것은 그 내용물이더라
내가 살아 보니까 남들의 가치 기준에 따라 내 목표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나를 남과 비교하는 것이 얼마나 시간 낭비고, 그렇게 함으로써 내 가치를 깎아내리는 바보 같은 짓인 줄 알겠더라
내가 살아보니까 결국 중요한 것은 껍데기가 아니고 알맹이더라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이더라 예쁘고 잘 생긴 사람은 TV에서 보거나 거리에서 구경하면 되고 내 실속 차리는 것이 더 중요하더라 재미있게 공부해서 실력 쌓고 진지하게 놀아서 경험 쌓고 진정으로 남에 대해 덕을 쌓는 것이 결국 내 실속이더라
내가 살아보니까 내가 주는 친절과 사랑은 밑지는 적이 없더라 소중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한 시간이 걸리고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하루가 걸리지만 그를 잊어버리는 것은 일생이 걸린다는 말이더라
내가 살아보니까 남의 마음속에 좋은 추억으로 남는 것만큼 보장된 투자는 없더라
- 고(故) 장영희 서강대 교수의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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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사는 방식이 다르듯, 살아보며 느끼는 것 또한 다를 것입니다.
보편적인 답은 있을지언정 정답은 없는 것이 각자의 인생일 테니까요.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인지 아세요? 남들 눈에 좋게 비치든 나쁘게 비치든 살면서 자신을 돌아보며 살아온 날을 정리할 줄 아는 마음가짐, 바로 그것입니다.
소신껏 사세요. 그러나 살면서 자신에게 중간보고하는 건 잊지 마세요. 그것이 한 번뿐인 인생을 바로 의미 있게 사는 Tip입니다.
# 오늘의 명언 아름다움은 어디에나 있다. 우리의 눈이 그것을 다 알아보지 못할 뿐이다. - 로댕 -
최 부자 집은 내가 잘살려면 형제, 이웃 사촌 모두가 다 잘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즉 이웃이 편해야 내가 편하지, 이웃이 불편한데 내가 편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최 부자 집의 가훈 중 또 하나는
'만 석 이상 하지 마라!'이다.
토지가 좁은 영남지방에서 만 석 이상의 소작료는 반드시 무리가 뒤따라 누군가의 원성을 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소작료를 만 석으로 고정하자 땅이 늘면 늘수록 최 부자 집의 소작료는 낮아졌다. 최 부자 집이 부유해지면 소작인의 곳간도 덩달아 불어나는 독특한 경제 형태였다.
이른바 '상생의 경제'였다.
그래서 소작인들은 최 부자가 더 많은 땅을 가지길 원했고 팔 땅이 있으면 앞다투어 최 부자 집에 알렸다고 한다.
마지막 가훈, "어렵고 힘들 때 이웃과 함께하라!"
풍년의 기쁨을 함께 누리면 흉년의 아픔 또한 이웃과 함께 감수하는 것이 부자의 도리라 믿은 최 부자네 사람들이었다.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이것이 바로 최 부자 집의 명성을 널리 알리고 12대 400년간 부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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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질 수 있다 해서 모든 것을 가진다면, 언젠간 차고 넘치게 됩니다.
그러나 가질 수 있는 것에 반만 가지고 나머지 반을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다면, 나중에는 나눈 것보다 더 큰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 오늘의 명언 마음대로 좋은 나뭇잎을 골라 뜯어먹는 목이 긴 기린의 행복을 생각할 때, 목이 짧아 굶어죽은 기린의 고통을 잊어서는 안된다. - 존 M.케인스 -
11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내 밑으로 여동생 한 명이 있다. 전업주부였던 엄마는 그때부터 나와 동생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셨다. 못 먹고 못 입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여유롭지 않은 생활이었다.
간신히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입사한 지 2년 만에 결혼하였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시어머니가 좋았고. 시어머니도 나를 처음부터 맘에 들어 하셨던 것 같다.
결혼한 지 벌써 10년. 10년 전 결혼하고 만 1년 만에 친정엄마가 암 선고를 받으셨다. 엄마의 건강보다 수술비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늘어갔다. 고심 끝에 남편에게 이야기했다.
남편의 성품은 알았지만, 큰 기대를 하는 것조차 미안했다. 남편은 걱정하지 말라며 내일 돈을 어떻게든 융통해 볼 테니 오늘은 걱정하지 말고 푹 자라고 했다.
다음 날, 친정엄마를 입원시키려고 친정에 갔지만, 어머니 또한 선뜻 나서질 못하셨다. 마무리 지을 게 있으니 4일 후로 입원을 미루자고 하셨다. 엄마가 마무리 지을 것이 뭐가 있겠나... 수술비 때문이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그때 시어머니께 걸려오는 전화.
"지은아 너 우니? 울지 말고 내일 나한테 3시간만 내 줄래?"
다음 날 시어머니와의 약속장소로 나갔다. 시어머니는 나를 보더니 무작정 한의원으로 데려가셨다. 예약 전화를 하셨는지 병간병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며 맥을 짚어 보시고 몸에 맞는 한약 한 재를 지어주셨다.
그리곤 다시 백화점으로 데려가셨다. 솔직히 속으론 좀 답답했다. 내가 이럴 때가 아닌 이유도 있지만, 시어머니께 죄송한 마음도 컸던 것 같다.
운동복과 간편복, 선식까지 사주시고 난 후에야 집으로 함께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날 방으로 부르시더니, 말씀하시기 시작했다.
"환자보다 병간호하는 사람이 더 힘들어. 병원에만 있다고 아무렇게나 먹지 말고, 아무렇게나 입지 마" 그리곤 봉투를 내미셨다.
"엄마 병원비에 보태 써라. 네가 시집온 지 얼마나 됐다고 돈이 있겠어. 그리고 이건 죽을 때까지 너랑 나랑 비밀로 하자. 네 남편이 병원비 구해오면 그것도 보태 쓰거라. 내 아들이지만 남자들은 본래 유치하고 애 같은 구석이 있어서 부부싸움 할 때 친정으로 돈 들어간 거 한 번씩은 꺼내서 속 뒤집어 놓는단다. 그러니까 우리 둘만 알자."
절대 받을 수 없다고 극구 마다했지만, 시어머닌 끝내 내 손에 꼭 쥐여주셨다. 나도 모르게 시어머니께 기대어 엉엉 울었다. 2천만 원이었다. 시어머니의 큰 도움에도 불구하고, 친정 엄만 수술 후에도 건강을 되찾지 못해 이듬해 봄, 결국 돌아가셨다.
친정엄마가 돌아가시던 날, 병원에서 오늘이 고비라는 말을 듣고, 쏟아지는 눈물을 참으며 남편에게 알렸다. 그때 갑자기 시어머님 생각이 났다. 나도 모르게 울면서 전화 드렸더니,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남편보다 더 빨리 병원에 도착하셨다. 엄마는 의식이 없었지만, 난 엄마 귀에 대고 말했다.
"엄마.. 우리 어머니 오셨어요. 작년에 엄마 수술비 해주셨어. 엄마 얼굴 하루라도 더 볼 수 있으라고..."
엄마는 미동도 없었다. 그때 갑자기 시어머니는 지갑에서 주섬주섬 무엇인가를 꺼내서 엄마 손에 쥐여주셨다. 우리 결혼사진이었다.
"사부인.. 저예요. 지은이 걱정 말고 사돈처녀도 걱정 말아요." 지은이는 이미 제 딸이고, 사돈처녀도 내가 혼수 잘해서 시집 보내줄게요. 그러니 걱정 마시고 편히 가세요."
그때, 거짓말처럼 친정엄마가 의식 없는 채로 눈물을 흘리시는 것이었다. 엄마께서 듣고 계신 거였다. 그렇게 우리 엄마는 편하게 하늘나라로 가셨다.
폐암 선고를 받은 아내는 수술을 받았지만 치료에 실패했고, 이내 온몸에 암세포가 퍼졌다. 암은 시신경까지 전이되었다. 진통제가 없으면 잠조차 편히 자지 못했고, 순하기 짝이 없던 사람이 차마 듣기 힘든 모진 소리를 했다. 나를 좀 보내달라고. 삶의 끈을 놓고 싶다고.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제야 내 잘못을 알았는데, 이제야 아내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는데... 언제나 후회는 뒤늦게 찾아온다.
왜 예전엔 아내의 소중함을 몰랐을까. 그동안 나는 집안일 한 번 도와준 적 없는 이기적인 남편이었다. 못나게도 전처와의 관계에서 받은 상처를 핑계로 고마운 아내에게 살갑게 대해주지 않았다.
아프고 나서야 아내가 눈에 들어왔다. 매일 아침 아내가 일어나면 입을 맞춘다. 머리를 빗겨주고, 소파에 앉아 TV를 볼 때도 꼭 손을 잡는다. 소중한 것이 곁에 있을 때 알지 못하고 그것이 떠나려 할 때 비로소 붙잡는 어리석음.
중매로 만난 아내는 돌아서서 가는 내 뒷모습을 보고 축 처진 어깨가 가슴 아파서 나를 선택했다고 한다. 아내는 어린 시절 부모님이 이혼하고, 새엄마 밑에서 어렵게 자란 상처가 있다. 그래서 자신이 서러웠던 만큼 당시 10개월이던 전처 소생 재국이도 상처 없이 자라길 바랐다. 그리고 아내는 누구보다 그렇게 해주었다. 그 덕에 아내와 함께한 세월 동안 나와 아이들은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만큼 아내의 고생은 컸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기 몸 한번 돌보는 법 없이 가족만을 위해 살았다.
아내가 아프고 4번째 가을이 찾아왔다. 요즘 외출할 때 나와 아내는 손을 꼭 잡고 다닌다. 금슬 좋은 부부처럼 보일까? 사실 우리에겐 절박한 이유가 있다. 암이 뼈까지 전이되어 이제 넘어지면 그대로 뼈가 부러질 만큼 약해졌다. 갈비뼈, 허리, 대퇴부까지 암이 퍼져 있었다. 요추는 모두가 암 덩어리 자체였다. 더 이상 할 치료도 없다. 아내를 등에 업고 다시 집으로 갈 밖에. 등에 업은 아내가 너무 가벼워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았다.
먹기만 하면 토하던 아내는 이제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아내를 놓고 싶지 않다. 그러나 아내는 이제 내 손을 잡고 있기 힘들어 한다. 견디기 힘든 극심한 고통에 아내는 자꾸 무너진다. 그래도 아내가 집에 있으면 방에만 누워있어도 사람 사는 집 같다.
아내가 통장과 보험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글씨를 쓸 기운이 없는 아내의 말을 받아 쓰고 정리하는 사소한 일에서조차 재국이와 나는 감정이 상하기 일쑤다. 나는 재국이의 일처리가 못 미덥고, 재국이는 알아서 잘하고 있는데 잔소리하는 내가 못마땅하다. 나와 재국이가 부딪치면 아내는 화를 낸다. 마음 놓고 갈 수 있겠냐고. 아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싶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안 떠날 수만 있다면 좋겠다.
아내가 정리해준 빽빽한 리스트를 받고 보니 늘 사소하게 생각했던 아내의 일들이 뭐 이리 복잡하고 많은지. 새삼 아내에게 고맙고 미안했다. 지금껏 아내는 큰 품으로 나를 감싸주고 있었다.
오늘은 아내의 마흔아홉 번째 생일. 건강할 땐 날짜조차 잊고 무심하게 지나쳐 버렸던 아내의 생일이 이렇게 소중한 날이 되다니. 아침 일찍 생일상을 차려 한 숟갈씩 조심스럽게 떠먹여 줬다. 주는 대로 잘 먹으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아내의 친구들을 초대했다. 사람을 좋아하던 아내는 친구가 많았다. 한걸음에 달려온 친구들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하지만 곧 말을 잇지 못했다. 침대 옆에 앉아 이리저리 말을 붙이다가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 눈물을 흘리는 친구도 있다. 모든 친구들은 생일상이 다 식도록 수저를 들지 못했다.
"고맙다." 주위가 조용해진 틈에 아내가 친구들에게 말했다.
"뭘 고맙노. 우리가 항상 너 생일도 제대로 못 챙겨줬는데. 우리가 미안치. 내년에 또 하자. 내년엔 더 크게 하자."
침대 곁으로 모여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케이크의 촛불을 불었다.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아내의 친구들이 한 명씩 아내에게 인사를 했다.
"잘 가라. 울기는 왜 우노." 오히려 아내가 친구들을 위로한다. "밥 잘 먹고 간다. 정신 차리고 있어, 또 올게." 친구들은 아내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나직하게 마지막 인사를 한다. 아내도 친구들도 안다.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냥 또 만나자 인사를 나눈다.
6월 5일 아침 10시 25분, 아내는 왔던 곳으로 조용히 돌아갔다. "잘 가라. 저 멀리 잘 가라. 거기서 아프지 말고, 잘 살고. 나중에 거기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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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22주년 기념일. 나는 아직 홀로 이 자리를 지킨다. 재국이는 벌써 서른이 되었다.
아내, 김경자를 사랑했다. 더 일찍 알지 못했지만 사랑했기에 결혼했고, 사랑했기에 2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했다. 아내가 떠난 빈자리는 시간이 지나도 메꿔지지 않는 허전함이 남는다. 그리고 못 해준 것들이 남아 후회가 된다.
그러나 남은 사람들이 해야 할 것은 후회나 자책보다는 느껴지는 빈자리의 크기만큼의 사랑일 것이다. 사랑한다면 늦은 때란 없다.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은 여전히 사랑, 사랑이다.
아직도 볼 때마다 설레는 예쁜 아내. 6년 전 5월, 경복궁에서 우연히 한국에 여행 온 아내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후광이 비친다는 게 뭔지 그때 비로소 알았다. 운명이란 그런 건지 아내 역시 별로 잘생기지도 않은 나를 보고 딱 들은 생각이 '귀엽다, 보조개'였다고 한다.
아내가 태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난 열렬하게 구애했다. 우리는 주저 없이 결혼을 결심했다. 하지만 집안의 반대에 부딪쳤다. 4개 국어를 하는 아내는 호주 유학을 앞둔 태국에서도 엘리트 집안의 막내였고, 더욱이 우리 부모님은 동남아 사람에 대한 편견이 있으셨다.
중학교 때부터 신문배달과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했던 나는 전문대를 졸업하고 카지노딜러로 일하고 있었다. 가진 건 없지만 건강했고, 사랑했기에 두려움도 없었다. 나란 놈을 만나 사랑 하나 믿고 덜컥 한국에 온 아내는 나를 좋은 아빠, 좋은 남편이 되게 해주는 여자였다. 그리고 바로 수현이가 우리에게 왔다. 수현이의 탄생은 힘겹기만 하던 내 인생의 축복이었다. 이 행복이 영원할 줄 알았다.
작년 봄 수현이가 백혈병 진단을 받았을 때 나는 믿지 않았다. 양가에 누구도 암환자가 없었다. 아내는 자기가 뭔가 잘못한 탓인 것 같다며 스스로를 책망했다. 독한 투약을 위해 손바닥만 한 아이 가슴에 주사 구멍을 뚫으면서도 요즘은 의술이 발달했으니 금세 고칠 것이라고, 항암치료면 나을 수 있다는 말을 믿었다.
그런데 수현이는 백혈병 중에서도 굉장히 희귀한 암이라 꼭 이식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때까지도 당연히 일치자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보통 80~90%는 일치자를 찾는다고 했다. 불안해하는 아내에게도 걱정하지 말라고, 이식만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안심시켰다.
그런데 없었다. 관련 있는 모든 단체에 연락해 봤지만 국내 기증자 26만 명 중 수현이와 유전자 유형이 맞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내는 혹시 태국에는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태국 전역을 뒤졌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수현이는 독한 항암치료를 7차까지 받아야 했다. 열이 펄펄 끓다 못해 40도는 우습게 올라갔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구토를 하며 배가 아파 우는 어린 아들을 바라보며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밖에.
온 세상을 뒤져서라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전 세계 2,600만 명이 넘는 기증자 중에서도 수현이와 맞는 사람은 없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거짓말 같았다. 한 명은 있을 거 같은데, 한 명 정도는 있을 것 같았는데... 수현이가 아픈 게 모두 엄마의 잘못이라고 아내는 자꾸 자기 탓을 한다. 그렇게 밝던 아내가 말수도 줄고 어떤 슬픔도 속으로만 삭인다.
작년 가을, 기적처럼 중국에서 3명의 기증자를 찾았지만 허무하게도 2명은 거절했고, 1명은 정밀검사 결과 불일치 판정을 받았다. 정말 피눈물이 나왔다. 세상이 다 미웠다.
힘없이 웅크린 채 누워 있는 수현이를 보면 아내와 내가 서로 사랑하면 안 되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았다면 수현이에게 이런 아픔이 없었을 텐데. 사랑한다는 이유로 앞길이 창창한 아내를 붙잡는 게 아니었다. 내 사랑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아빠 추워." 또 다시 수현이가 열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수현이의 몸을 부지런히 닦으며 덜덜 떠는 아이를 달랬다. "수현아 힘내야 돼, 알았지?" "응." "우리 수현이, 잘하고 있어. 그러니까 좀만 더 힘내자, 응?" "응." "손 잡아줄게, 수현아. 아빠가... 손 잡아줄게."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아내와 나는 전단지를 만들어 길거리에서 나눠 주었다. "부탁합니다. 한 번만 읽어 봐주세요." 각종 단체, 교회, 군부대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전화를 하고 또 찾아갔다.
수현이의 얼굴이 들어간 전단지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걸 보면 너무 가슴이 아팠다. 쓰레기통에 버려진 전단지가 보이면 모두 주웠다. 구겨진 부분을 반듯하게 펴며 몇 번을 울었는지 모른다.
한편으로는 세상에 고마운 사람들이 정말 많다는 것도 알았다. 휴직을 한 내 딱한 사연을 알게 된 200여 명의 회사 동료들이 조혈모세포 기증에 나서 주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수현이에게 맞는 기증자를 찾을 수는 없었다. 마지막 희망이 사라졌다.
아내와 아이 앞에서는 강한 척을 했지만 혼자 있을 때는 나도 너무 불안하다. 온갖 생각을 주체할 수가 없다. 그래도 강해져야 한다. 흔들리면 안 된다. 나는 아빠니까.
항암치료로 인해 머리카락이 모두 빠진 수현이를 위해 나도 머리를 밀었다. 자신과 똑같은 모습이 되어가는 아빠를 보며 신이 난 수현이가 까르르 웃었다.
우리는 반일치이식을 하기로 결심했다. 일치자가 아닌 반일치자의 조혈모 세포를 이식하는 것으로 위험 부담이 큰 수술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이 각각 50%의 유전자를 물려준 부모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었다. 아내는 자신이 해주고 싶다고 했다. 아이에게 해준 것이 없다고. 수혈을 하듯이 엄마의 조혈모 세포를 천천히 수현이에게 넣어주었다.
수술 후 2주 정도까지 수현이의 몸 상태는 괜찮았다. 하지만 안심하던 찰라 거부반응은 갑자기 왔다. 빨갛게 피부 이상이 나타나더니 갑자기 온몸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숙주병이라 불리는 이식 부작용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피부 숙주반응이 온 것이다. 노련한 의료진조차 당황했다. 병원에 비상이 걸렸다. 지금까지 반일치 이식한 환자들 가운데서도 보기 힘들만큼 심한 거부반응이라고 했다.
온몸이 울긋불긋 물집이 잡힌 수현이가 쪼그리고 앉아 손가락만 만지작거리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이렇게 순한 아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런 고통을 주는 걸까.
지금까지 잘 참던 수현이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너무 아프다고 호소했다. 보드랍던 피부가 심한 발진으로 보고 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너무나도 애처로웠다. 지켜주겠다고 했는데, 부모가 돼서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니. 가슴이 무너졌다. 그리고 퇴원은 무기한 연기됐다.
봄이 왔다. 나는 여전히 수현이 곁에 24시간 붙어 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 "나중에 아빠랑 목욕탕 같이 가자." "응." "수현이 최고." "응!"
수현이는 마침내 숙주병을 이겨내고 회복세로 돌아섰다. 피부에는 아직 흉터가 남아 있었지만 10년이 지나면 다 없어질 것들이다. 장한 내 아들, 수현이. 아내는 매일 부지런히 반찬을 만들어 병원으로 싸가지고 온다. 아내를 보면 나는 괜히 아침도 못 먹었다고 엄살을 피운다.
"맛있다!" "짜지 않아?" "응, 조금 짜." 웃음이 나온다. 괜히 음식 투정하며 사랑하는 아들 곁에 있는 이 사소한 일상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아내는 예전의 해맑은 웃음을 되찾았다. 함께 빡빡 밀었던 내 머리는 제법 자랐다.
"수현아, 엄마는 아빠 거." 엄마를 덥석 끌어안는 아빠를 보며 수현이가 까르르 웃는다.
그리고 병원에 입원한 지 석 달. 오늘 우리 세 식구는 퇴원한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 용감하게 달려와 준 고마운 수현이. 설령 수현이에게 아직 갈 길이 남았다 해도 우리는 두렵지 않다. 우리의 사랑은 결코 잘못되지 않았다. 사랑은 아낌없이 내 걸 내주고 다시 한 번 더 주는 것이다. 우리는 가족이다.